▲ 주철희 
지리산권문화연구원 여순센터 소장
여순사건이 발발하면서 세간의 관심으로 떠오른 사건이 혁명의용군 사건이다. 여수 제14연대 연대장이었던 오동기 소령은 1948년 9월 28일 육군총사령관 송호성으로부터 소환 명령을 받고 서울로 상경하였다. 그는 즉시 육군 정보국에 구금되었다. 정부는 혁명의용군 사건과 관련하여 10월 1일에 민간인 최능진, 서세충, 김진섭 등을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혁명의용군사건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전 수사국장이며 5·10 선거 당시 동대문 갑구 입후보로서 이대통령의 낙선을 꾀한 것으로 이름있는 崔能鎭(51)씨는 종로구 누상동 166-14 徐世忠(61), 후암동 105-65 김진섭(36) 양씨와 더불어 내란음모의 혐의로 지난 1일 오후 3시경 … 구금당하고 있다. 구속영장에 나타난 검거 혐의 내용을 보건대 전기 3씨는 작년 12월 이후 육군경비대 오동기 소령 등 국군소속의 젊은 장교 다수와 공모하여 국방경비대로 하여금 혁명의용군을 조직하고 기회가 도래하면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시킴으로서 정부를 차지하려는 일종의 쿠데타를 음모했다는 것인데 … 이에 관하여 국방부 모 고급장교는 “일종의 반란적 성격을 띠인 사건인데 이것이 어느 정도 근거가 확실하다면 국군은 다만 일반에게 이용당했을 것이고 앞으로 관련된 군인이 드러나는 대로 엄중 처단하겠다”고 말했다.(『조선일보』 1948년 10월 5일)

5‧10선거에 서울 동대문 갑구에 입후보한 이승만을 낙선시키기 위해 미군정청 경무부 전 수사국장이었던 최능진이 이승만과 같은 지역구에 출마했다. 최능진은 이승만을 낙선시키려고 했지만 실패하자 서세충․김진섭 등과 정부 전복 쿠데타를 음모했으며, 제14연대장 오동기 소령을 통해 국군소속의 젊은 장교를 중심으로 혁명의용군을 조직하여 대한민국 정부 전복을 꾀하였으나 체포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계획은 1947년 12월부터 차근차근 준비되었으며, 9월 20일과 24일 양일에 거쳐 군자금을 제공하여 10월 러시아 혁명기념일에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동기가 9월 28일 소환명령을 받으면서 혁명의용군사건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번 사건의 핵심은 최능진 등의 민간인이었고, 오동기를 비롯한 군인은 이들 민간인에게 이용당했다는 것이 국방부 관계자의 말이다. 여순사건 발생을 미리 예견이라도 하고 있는 듯한 20일 전 정부 발표는 강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 정부 발표에서 나타난 중요한 것은 여순사건 발발 이전에 국군과 민간인이 결합된 일종의 반란적 성격을 정부에서는 이미 수사하고 있었고, 거기에 제14연대장이 관련된 것으로 파악했다.

체포된 이들은 내란음모죄 등으로 검찰청에 송치되었는데 민간법정에서는 최능진‧서세충‧김진섭 등 3명이 구속되어 재판이 진행되었다. 군법정에서는 오동기 외에 9명이 구속되어 재판을 받았다.

혁명의용군 사건 제1회 공판은 1949년 1월 21일에 서울지방법원 제4호 법정에서 개최되었다. 이날 재판에서는 각자 역할이 드러났는데, 최고책임자는 서세충이며, 재정책임자는 최능진, 국방경비대의 최고책임자는 오동기, 경비대 외곽은 김진섭, 강원도 원주부대 동원책임자는 안종옥 외 3명, 춘천부대 동원책임자는 박규일 외 2명이었다.

이날 재판에서 최능진은 “그 사람들은 자기들에 아첨하는 사람이면 채용하고 내가 탐관오리를 적발하여 보고하면 어느 사이에 그 사람들과 결탁하고 만다. 이에 대하여 나는 민족정기를 위하여 당시 러치 장관하고 격론까지 하였다”면서 미군정에 대한 불평불만이 있음을 시사했다. 또한 김진섭은 국방부와 수도청에서 자백한 것은 전혀 허위사실이며, 고문에 못 이겨 되는대로 진술했다고 하면서 “도대체 2, 3백 명의 병력으로 중앙을 포위하여 쿠데타를 한다는 것은 어린애 장난이냐”며 쿠데타를 전면 부인했다.

오동기는 여수주둔 제14연대 연대장이었으며, 이전에도 제8연대 소속인 원주부대와 춘천부대에서 근무한 적이 없다. 그런데 원주와 춘천부대 200여명 병사를 중심으로 혁명의용군이 조직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책임자는 안종옥과 박규일이었다.

정부가 혁명의용군사건을 처음 발표할 당시 “오동기 소령 등 국군소속 젊은 장교 다수가 공모하였다”고 했다. 그런데 원주부대와 춘천부대 동원책임자인 안종옥과 박규일의 계급은 이등병과 일등병이었다. 하사관도 아닌 이등병과 일등병에 불과한 계급의 군인이 혁명을 일으키기 위한 군부대의 동원책임자로 드러난 것이다. 이후 국군에서는 오동기 이외의 장교를 이 사건과 관련하여 수사하거나 재판에 회부한 군인은 한 명도 없다. 특히 이 사건으로 연루된 군인들 중 오동기를 제외하고는 여수 주둔 14연대 소속 장교와 병사는 한 명도 없다.

오동기 소령을 비롯한 군인들은 1949년 1월 29일 군사재판 고등군법회의에서 오동기 육군소령 10년, 안종옥 이등병 5년, 박규일 일등병 3년, 김봉수 일등병 3년, 김용간 일등병 2년, 일등병 오필주 1년 등으로 징역형이 선고되었다. 국가를 전복시키고자 혁명의용군을 조직한 군인이라는 신분을 감안한다면 상대적으로 형량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여순사건 진압이후 협력자 색출과정에서 혐의 의심만으로 즉결 처분했던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낮은 수준의 형량이었다.

이날 재판관이었던 김완룡 중령은 판결문에서 “피고들은 탐관오리·모리배 때문에 남한정부가 부패되어가고 있어 정부를 전복하려고 했다”면서 “좌익사상에서 나온 좌익혁명이 아니고 민족주의자 사상에서 나온 민족혁명이었다”고 말하였다. 이 총리가 밝혔던 공산주의와 극우정객의 공모는 거짓으로 들어난 것이다. 또한 김 중령은 직․간접적으로 호남방면사건과 관련성이 있다고 하였지만, 재판부는 이에 대해서 밝히지 못하였다. 즉 여순사건과 혁명의용군사건의 관련성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언급하지 않으면서 실형을 선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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